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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2025년 5월 11일, 이옥선 할머니께서 별세하셨습니다.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25-05-12
첨부파일

 

나눔의집에서 생활하신 이옥선 할머니께서 2025511일 오후 8, 향년 97세의 일기로 영면에 드셨습니다.

 

고인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하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부산에서 태어나신 이옥선 할머니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열다섯 살 무렵,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에 자식이 없는 집에 수양딸로 보내졌으나, 실상은 식모살이를 강요받는 처지였습니다.

 

내 머리를 이만큼(허리까지 손을 내리면서) 길었댔어. 그래 길어서 내가 혼자 [머리를] 못 따서 엄마가 빗어가 따 안 주면 아버지가 따 주는 거야, 그 머리를. 그 집 가서 그 머리를 그렇게 똑 짤라버리잖아. 그래서 내가 울었어. (...) 한 날은 또 주인집에서 어떤 수작을 하는가 하면 (...) (할머니의어깨쪽을 가리키며) 내 여기 송곳찜질한 자리, 여태 흠집이 있어. 그래갖고 막 때리[잖아]. 그래 손님 안 받는다구. 손님하고 그렇게 한다고 그러며 나를 욕하며 끌고 나와갖고 길에치 끌고 나와갖고 때리며 욕하며 송곳으로 이래 찌른거야.

 

그곳에서 저항하던 중 울산의 여관집으로 팔려갔고, 1941년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납치되어 트럭에 실린 채 중국으로 끌려갔습니다.

 

긴데(그런데) 턱 끌고 가는 거 안 가겠다고 막- 발버둥질 하니까, 쪼끔 가니까 트럭이 하나 있어. 그래 그 트럭에다 이래 톡 주서 올려놓고 우리가 쪼끄만게 뭐 남자들의 힘에 감당해? 턱 들어올려노니까 그저 그대로 가는게. 그래서 거기서 내려 놔 달라고 막 소리치며 야단하니까 입을 탈아막아.

 

도착지는 중국 투먼역(圖們驛, 도문역)이었으며, 이후 연길의 동()비행장이 있던 일본군 부대로 보내져 강제노역과 성폭력을 겪었습니다.

 

그 비행장이 일본 사람들이 거기 침략해 들어가 갖고 비행장이 작으니까 크게 확대를 하는 거야. 거기 가서 비행장을 닦는 거야, 그 마당을. 군인들 있는데 가면 가시철줄 이렇게 철망 거기처럼 그렇게 한 거야. 기다래서 거기다가 전기를 넣는 거야. 전기를 왜 넣는가, 우리 도망간다고. 도망가면 거기 붙어 죽으라고 전기를 넣는거야

그 때 그... 부대 안에서 첫감에(처음에) 가니까 집을 큰 걸 줬거든. 줬는데... 일본 사람들이 참 그런 거 보면 더럽고도 치사한거야. (...) 여자들이 열이 있으면 열, 스물 있으면 [스물], 저네 맘대로 강간하는 거야. 그런 거 사람 많은 거 상관 안 하는 거야.

 

이후 도미꼬라는 일본 이름을 부여받은 채 간판이 있는 양철집의 위안부로 보내졌으며, 월경 중에도 접대를 강요당했습니다.

 

주일날은 군인들이 이렇게 (길게 줄을 서는 시늉을 하며) 줄 서는 거야, 두 줄로. 두 줄로 이렇게 줄서서 저기까지 이렇게 아주. 그거 다 받아내야 되는거야. (...) 군인을 한 날에 삼십 명이나 사십 명을 받으라고 하면 어떻게 받는가? 밥도 잘 먹지 못하고. 그래갖고 군인들이 끌어가 갖고 조그마니까 그게 어떻게 하겠는가, 제가 맘대로 못하니까 성숙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여자를 칼로 째는 거야. 째고 찌르고 죽이는 거야

 사르바르(살바르산)라고 606호야. 그 때 흠집이 있었는데 이젠 다 나이 먹으니까 몇십년 되니까 이래 조금 남았어 아직도, 이게. (...) 내가 시원(수은)을 썼잖아. 그걸 쐬어갖고 이렇게 애기를 못 낳잖아. (...) 쐬우는 거야. 밑에 김을 쐬우는 거야. 목만 내놓고 이불을 이렇게 쓰고선.

 

열아홉 살 무렵, 폭격을 피해 도망치던 중 만난 남성과 결혼하여 중국 길림성에서 살아갔고, 이후 재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귀국을 시도했고, 중국연변과학기술대학교 박상재 처장의 도움으로 부산에 도착했지만, 이미 많은 것이 변해 있었습니다.

 

[옛날] 우리 집 동네를. 이렇게 그려주면서 (약도에서 집을 찍어주는 시늉을 하며) 여기는 우리 집인데 이 집 뒤에 빨래하는 강이 큰 게 있고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가야 보통학교가 있었는데, 근데 [알고 보니까] 거기 강이 있었는데 그게 없어졌어. 그러고 우리 집이 내 있을 적에 보수정이라고 했는 데 지금 보수동이라고 정자가 동자로 바뀌었어.

200061, 한국으로 영구 귀국해 나눔의집에 머물게 되었으나, 가족들이 이미 사망 신고를 한 상태였기에 국적 회복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일년 반 동안 내가 [나눔의 집]이 방에 가만-히 죽어 살고 있었어요. (...) 국적이 없으니까. (...) 우리 집에서 사망 신고를 해 뻐렸지. 그래 법정 놀음했는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오는가.

 

이옥선 할머니는 일본군의 도검에 찔린 손과 발의 흉터, 구타로 인한 후유증을 안고도 인권운동가로서 피해 실상을 국내외에 알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2002년 미국 브라운대 강연을 시작으로 일본, 호주 등지를 방문해 위안부참상을 알리고, 2013년에는 미국, 독일, 일본 3개국의 12개 도시를 순회하는 인권 대장정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옥선 할머니께서 떠나신 지금, 국내에 생존해 계시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는 단 6명입니다.

 

할머니의 고통과 증언을 잊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알리고 기억하겠습니다.

 

이옥선 할머니,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언제나 할머니를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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