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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피해자 박차순할머님 타계
작성자
나눔의 집
작성일
2017-05-05

중국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일본군'위안부'피해자 박차순 할머니(95·사진)가 2017년 1월 18일 현지에서 별세했다. 이에 따라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생존자는 39명으로 줄었다.

 

2016년 중국 길림신문의 김청수 기자의 취재가 박차순 할머님의 마지막 기사가 되었습니다.

 

 

<<박차순할머니와 흘러간 옛노래 그리고 “아리랑”>>

엄선생은 “이제 무한의 효감시에 ‘모은매’라고 하는 95세나는 조선족‘위안부’할머니가 계신다.”고 했다.
5월 26일 이른 아침, 우리는 호북성 효감시 룡점촌(龙店村)의 모은매할머니네 댁을 방문하였다.

할머니는 양딸 황영화(黄荣花)씨의 도움으로 겹옷을 걸쳐입으며 흐느껴 울고있었다. 딸은 자주 손수건으로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리며 “이렇게 모처럼 찾아주시니 너무 고맙고 또 옛날 생각이 나나봐요.” 하며 어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과 함께 있는것이 박차순할머니의 최대의 행복이다. 우리는 할머니와 마주하고 고향은 어디며 어찌되여 여기까지 오게 되였느냐 하는 식으로 수인사를 나누었다. 한참을 무언가 더듬고있던 할머니는 “전라북도 나주…” 하고 의문조로 외우더니 이어 “차수니… 박차순!” 하며 자신의 옛 이름자를 찾아내고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차순이가 여섯살 되는 해에 아버지는 일본으로 징역에 끌려가 죽고 엄마는 두 녀동생을 데리고 어디론가 살길을 찾아 떠나갔다. 외가집에 맡겨진 차순이는 거리를 떠돌며 살았고 스무세살 되던 해 1945년 6 월 “양말공장에 취직”되여 중국으로 왔다.
여느 공장이거니 하고 들어선 곳이 담을 높이 두른 남경의 한 위안소였고 그곳에서 또다시 무한의 위안소로 옮겨졌다.

 

그러던 어느날, 총포소리 요란하고 비행기폭격이 쏟아지는 혼란한 틈을 타 보초병의 눈을 피해가며 겨우 위안소를 빠져나왔다. 죽기내기로 거리에 뛰여나온 그는 효감시에서 몇십리 떨어진 대황만(大黄弯)에 이르러 안해를 잃고 혼자 사는 황씨를 만났다. 순박한 농민인 황씨는 박차순이를 극진히 아껴주었다. 아이를 가질수 없는 그들 부부는 60년대초에 두살짜리 양딸을 수양하면서 60년간 시골에서 농사군으로 살아왔다.

“우리 엄마는 모주석과 ‘친척’사이입니다. 모주석께서 해방시켜주었다고 자기 성을‘모’씨로 고쳤답니다.” 영화씨는 소리내여 웃으며 엄마의 성씨개명에 대해 들려주었다.
해방후 어느 한 호구조사때 할머니는 모주석의 은덕을 잊을수 없다며 성을 모씨로 고치고 조선족들이 즐기는 은백색의‘은’자에 남편이 좋아하는 매화 ‘매’자를 넣어 이름을 “모은매”(毛银梅)라고 고쳐지었던것이다.

모은매할머니는 70여년동안 한족마을에서 살아오면서 조선말을 까맣게 잊고있었다. 우리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보통 한어도 아닌 심한 지방방언을 쓰고있어 모든 대화는 딸의 “통역”으로 이루어졌다.

 

위안소를 빠져나오던 경과를 들려주는 박차순할머니.
필자는 모은매할머니의 "위안부"시절 고초에 대해 조심스레 여쭈어보았다. 딸에게서 질문을 전달받은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외로 틀었다. 한참을 지나서 오른 주먹으로 가슴을 “텅-텅-” 소리나게 치셨다. 그러던 할머니는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침대머리에 개여놓은 이부자리에 쓰러지듯 누우셨다. 그리고 계속 가슴을 두드렸다.

(아차, 큰 실수를 저지른게로구나!) 필자는 그만 당황해났다.
“엄마는 그 일만은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지금 와서 그 얘기를 하는데 뭐가 그다지 어렵냐’고 내가 탓해도 응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딸은 하얗게 질려가는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안정을 취하게 하려는듯 아무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엄선생도 따라나섰다.

필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몸둘바를 몰라 그냥 할머니 침대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할머니의 두 눈귀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새여 흐르고있었다.
“그놈들 사람도 아니였어! 울면 어떻게 다 울고 말을 하면 어떻게 다 말할수 있겠어!” 할머니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하소연 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것이였다.

갈매기 우는 선창가에 손을 들어 흔들었소.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기차는 떠나간다, 부슬비 이즈러지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분명 우리 말 노래였다! 우리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할머니께서 그토록 똑똑하게 우리 말 가사를 발음하며 높낮은 곡조를 뽑아내고있었다.

할머니는 “정든 땅 뒤에 두고”,“잘 있소 잘 가소”를 몇번이고 되뇌이더니 이윽고 깊은 한숨과 함께 “아-리랑 아-리랑” 하며 한 서린 “아리랑”을 부르는것이였다!
필자는 그만 할머니의 손을 덮썩 부여잡고 두어깨사이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리고말았다.


(할머니! 우리가 대체 무얼 어떻게 해드려야 할머니 가슴에 묻힌 그 한을 다 풀어드릴수 있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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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보기(길림신문)

http://kr.chinajilin.com.cn/cxz/content/2016-11/24/content_180629.htm